[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90] 3부 오름-(149)열안지(오름)
입력 : 2026. 09. 29(화) 03:00
김찬수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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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 있는 마루’가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모습’으로

수많은 한자 지명의 비밀
[한라일보] '열안지'라고 부르는 오름이 제주시 오라동에 있다. 이 이름이 수상하다. 1997년 제주도가 펴낸 '제주의 오름'에서는 산 모양이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하여 열안지오름이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책에는 제비가 알을 품은 모습이라 하여 '연란지(燕卵旨)'라고도 했다는 설명까지 나온다.
그러나 옛 기록을 하나씩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653년 '탐라지'와 1660~1670년대 '동국여지지' 등에는 여란지악(呂亂止岳)이 보인다. 이후 18세기에는 여란지(呂難止), 19세기에는 열안악(悅安岳)과 열란지(列蘭地), 20세기 전후에는 여란지(女卵旨), 연란악(?卵岳)이라는 표기가 나타난다. 현대에 들어서 열안지 또는 열안지오름이라는 이름과 열안지악(列?止岳) 같은 표기도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오름을 나타내는 한자가 거의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여란지(呂亂止)·여란지(呂難止)·열란악(悅安岳)·열란지(列蘭地)·여란지(女卵旨)·연란악(?卵岳)·열란지악(列?止岳) 등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느낌도 있지만 오히려 이름의 기원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것은 '여란지·열란지·열안지'와 비슷한 토박이말이 있었고, 기록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비슷한 한자를 골라 적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말하는 사람과 시대에 따라 발음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열안(列雁)이라는 글자만을 놓고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모습'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후대의 한자 표기에 다시 뜻을 부여한 해석일 가능성이 있다.
이름의 뒷부분인 '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 문헌에서는 旨(지)·止(지)·地(지) 등 서로 다른 글자로 나타난다. 글자의 뜻은 다르나 소리는 모두 '지'다. 이 '지'가 산등성이 또는 높은 곳을 나타내는 '????(마루)'와 관련된 오래된 지명 요소일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 오름 지명에서 오늘날 뜻을 알기 어려운 요소들이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특정 글자로 표기되고, 뒤에는 그 한자의 음만 남는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란·열란·열안'은 고대어 샘
그렇다면 열안지의 뜻을 푸는 열쇠는 앞부분인 '여란·열란·열안'에 있다. '여란' 또는 '열란'의 'ㄴ'을 관형적 기능을 하는 요소로 본다면 핵심은 '여·열', 더 오래된 형태로는 '여ㄹ' 계통의 어근이 된다.
오름 이름에는 그 장소에서 쉽게 눈에 띄는 특징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물과 계곡, 바위, 높이와 지형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열안지오름의 특징은 무엇일까. 산의 모양이 특별히 기러기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눈여겨볼 것은 물이다.
열안지오름 남쪽에는 예부터 '열안지물' 또는 '열안지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물이 귀한 제주 중산간에서 비교적 풍부히 물이 솟는 곳이었다. 이 샘의 중요성은 현대의 수원 개발에서도 잘 드러난다. 열안지물은 1959~1960년경 제주시가 간이상수도 확충을 위해 실시한 수원조사 과정에서 산천단에 이은 제2수원지로 선정되었다. 공식 상수도 연혁에 따르면 1964년 산천단과 함께 간이상수도 시설공사가 시작되었고, 1966년에는 하루 600㎥(톤) 규모의 시설이 준공되었다. 오름 남쪽에서 자연적으로 솟는 물을 모아 수로와 도관을 통해 배수지로 보내 생활용수로 공급하였다. 열안지의 샘이 단순한 작은 샘이 아니라 실제 상수원으로 이용할 정도로 중요한 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고대 지명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고구려 지명 자료에는 '샘'을 뜻하는 '천(泉)'에 대응하는 표기로 어을(於乙)이 나타난다. 한자음으로 읽으면 '어을'이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실제로 정확히 '어을'이라고 발음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다. 고대 지명을 연구하는 과정에서는 이 말의 음가를 '얼·어르·어러·어리' 등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인근의 '어리목' 역시 이러한 점에서 샘이 있는 목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목이란 흐름이나 길이 좁아지거나 건너는 중요한 지점을 나타낸다.
오름 지명이 품은 고대어의 단서
열안지의 '여·열'도 이와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여'와 '어'는 서로 가까운 음으로 변화할 수 있고, '열' 역시 오래된 음형을 상정하면 '여르'와 같은 형태와 비교할 수 있다. 여기에 관형적 요소 'ㄴ'과 지형을 나타내는 요소가 결합하면서 '여란지·열란지·열안지'와 같은 형태로 변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고구려 지명의 어을(於乙)과 제주도의 '여란지·열안지'를 직접 이어 주는 문헌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제주 지명의 오래된 언어층을 보여주는 자료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확정된 어원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시대의 표기와 지형적 특징을 통해 검증해 나가야 할 가설로는 충분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봉개동에도 '열안지' 또는 '열안지오름'이라고 부르는 오름이 있다. 이 오름 자체에는 뚜렷한 샘이 없지만 오름으로 들어가는 길목, 안세미오름 입구에는 '조리세미'라는 샘이 있다. 별다른 지형적 특징이 두드러지지 않는 두 오름이 모두 물이 있는 장소와 관계되어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결국 '열안지'를 오늘날 한자 열안(列雁)에 기대어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모양의 오름'이라고 설명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여러 시대에 걸쳐 한자 표기가 계속 달라졌다는 사실은 이 이름이 한자의 뜻에서 생겨났다기보다 오래된 토박이말의 소리를 한자로 옮긴 지명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열안지오름의 중요한 특징인 샘과 고대의 물 관련 어휘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열안지'는 본래 '샘이 있는 마루', 곧 '물이 나는 높은 곳'을 가리키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말의 소리도 달라지고 본래 뜻도 잊혔지만, 오름 남쪽에서 솟아나는 열안지물은 지금도 그 오래된 이름의 뜻을 풀어주는 중요한 단서로 남아 있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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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열안지'라고 부르는 오름이 제주시 오라동에 있다. 이 이름이 수상하다. 1997년 제주도가 펴낸 '제주의 오름'에서는 산 모양이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하여 열안지오름이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책에는 제비가 알을 품은 모습이라 하여 '연란지(燕卵旨)'라고도 했다는 설명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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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안지, 표고 583.2m, 자체높이 113m, 동서 길이 1㎞ 정도의 오름이다. 검은오름 정상에서 촬영. 김찬수 |
그러나 옛 기록을 하나씩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653년 '탐라지'와 1660~1670년대 '동국여지지' 등에는 여란지악(呂亂止岳)이 보인다. 이후 18세기에는 여란지(呂難止), 19세기에는 열안악(悅安岳)과 열란지(列蘭地), 20세기 전후에는 여란지(女卵旨), 연란악(?卵岳)이라는 표기가 나타난다. 현대에 들어서 열안지 또는 열안지오름이라는 이름과 열안지악(列?止岳) 같은 표기도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오름을 나타내는 한자가 거의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여란지(呂亂止)·여란지(呂難止)·열란악(悅安岳)·열란지(列蘭地)·여란지(女卵旨)·연란악(?卵岳)·열란지악(列?止岳) 등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느낌도 있지만 오히려 이름의 기원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것은 '여란지·열란지·열안지'와 비슷한 토박이말이 있었고, 기록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비슷한 한자를 골라 적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말하는 사람과 시대에 따라 발음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열안(列雁)이라는 글자만을 놓고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모습'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후대의 한자 표기에 다시 뜻을 부여한 해석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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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안지수원, 과거 수원 개발 당시 시설한 집수정과 도관이 보인다. 김찬수 |
이름의 뒷부분인 '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옛 문헌에서는 旨(지)·止(지)·地(지) 등 서로 다른 글자로 나타난다. 글자의 뜻은 다르나 소리는 모두 '지'다. 이 '지'가 산등성이 또는 높은 곳을 나타내는 '????(마루)'와 관련된 오래된 지명 요소일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 오름 지명에서 오늘날 뜻을 알기 어려운 요소들이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특정 글자로 표기되고, 뒤에는 그 한자의 음만 남는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란·열란·열안'은 고대어 샘
그렇다면 열안지의 뜻을 푸는 열쇠는 앞부분인 '여란·열란·열안'에 있다. '여란' 또는 '열란'의 'ㄴ'을 관형적 기능을 하는 요소로 본다면 핵심은 '여·열', 더 오래된 형태로는 '여ㄹ' 계통의 어근이 된다.
오름 이름에는 그 장소에서 쉽게 눈에 띄는 특징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물과 계곡, 바위, 높이와 지형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열안지오름의 특징은 무엇일까. 산의 모양이 특별히 기러기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눈여겨볼 것은 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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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안지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과 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찬수 |
열안지오름 남쪽에는 예부터 '열안지물' 또는 '열안지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물이 귀한 제주 중산간에서 비교적 풍부히 물이 솟는 곳이었다. 이 샘의 중요성은 현대의 수원 개발에서도 잘 드러난다. 열안지물은 1959~1960년경 제주시가 간이상수도 확충을 위해 실시한 수원조사 과정에서 산천단에 이은 제2수원지로 선정되었다. 공식 상수도 연혁에 따르면 1964년 산천단과 함께 간이상수도 시설공사가 시작되었고, 1966년에는 하루 600㎥(톤) 규모의 시설이 준공되었다. 오름 남쪽에서 자연적으로 솟는 물을 모아 수로와 도관을 통해 배수지로 보내 생활용수로 공급하였다. 열안지의 샘이 단순한 작은 샘이 아니라 실제 상수원으로 이용할 정도로 중요한 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고대 지명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고구려 지명 자료에는 '샘'을 뜻하는 '천(泉)'에 대응하는 표기로 어을(於乙)이 나타난다. 한자음으로 읽으면 '어을'이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실제로 정확히 '어을'이라고 발음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다. 고대 지명을 연구하는 과정에서는 이 말의 음가를 '얼·어르·어러·어리' 등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인근의 '어리목' 역시 이러한 점에서 샘이 있는 목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목이란 흐름이나 길이 좁아지거나 건너는 중요한 지점을 나타낸다.
오름 지명이 품은 고대어의 단서
열안지의 '여·열'도 이와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여'와 '어'는 서로 가까운 음으로 변화할 수 있고, '열' 역시 오래된 음형을 상정하면 '여르'와 같은 형태와 비교할 수 있다. 여기에 관형적 요소 'ㄴ'과 지형을 나타내는 요소가 결합하면서 '여란지·열란지·열안지'와 같은 형태로 변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고구려 지명의 어을(於乙)과 제주도의 '여란지·열안지'를 직접 이어 주는 문헌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제주 지명의 오래된 언어층을 보여주는 자료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확정된 어원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여러 시대의 표기와 지형적 특징을 통해 검증해 나가야 할 가설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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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
결국 '열안지'를 오늘날 한자 열안(列雁)에 기대어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모양의 오름'이라고 설명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여러 시대에 걸쳐 한자 표기가 계속 달라졌다는 사실은 이 이름이 한자의 뜻에서 생겨났다기보다 오래된 토박이말의 소리를 한자로 옮긴 지명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기에 열안지오름의 중요한 특징인 샘과 고대의 물 관련 어휘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열안지'는 본래 '샘이 있는 마루', 곧 '물이 나는 높은 곳'을 가리키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말의 소리도 달라지고 본래 뜻도 잊혔지만, 오름 남쪽에서 솟아나는 열안지물은 지금도 그 오래된 이름의 뜻을 풀어주는 중요한 단서로 남아 있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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